작년에 발매된 우주소녀의 EP 'Neverland'에 수록된 'Pantomime'. 뒤늦게서야 정말 멋진 곡을 발견했다. 이런 곡이 K팝을 안 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좋아해본 사람은 없게 만드는 거 같다. 개인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의 실험적인 사운드를 좋아하는데, 우주소녀의 'Pantomime'에선 내가 f(x)에게 기대했을 법한 소리들이 종종 들린다. 끊임없이 즐거움을 선사하는 구성과 변주, 치밀한 음악이론을 바탕으로 한 코드진행과 부지런함, 순식간에 여러 곳을 오가는 색채의 분위기, 마치 고전연극 같은 가사와 결을 맞추듯 클래식 음악이 떠오르는 음계와 박자 위를 수놓는 사운드. 이 모든 요소가 '이지 리스닝'과는 정 반대에 있는 지점을 향해 달려 나가며, 아무리 수많은 볼거리로 무장한 K팝이라도 결국 '음악은 듣는 재미에서 출발한다'는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멋있는 부분이 너무 많은 나머지 틀어두고 계속 듣는 게 아니라 집중할 수 있을 때 아껴 듣고 싶은 곡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론 우주소녀가 어차피 'Unnatural'로 사운드나 태도에 변화를 줄 거였다면 'Pantomime'을 아껴뒀다가 발매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Butterfly'는 좋았는데 'Unnatural'은 고음에 쏟는 에너지에 비하면 아쉬운 느낌이 있어서 더 그렇다. (대신 'Unnatural'은 가사가 재밌었다. 이미 온갖 K팝에서 백번 써먹은 '네 앞에선 어쩔 줄 몰라 부끄러워 날 이렇게 만든 너 정말 대단해'가 아니고 '아 씨발 나 왜이래'에 가까워서 신선했다. '너'에 촛점을 맞춘 게 아니라 '나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데서 오는 차이가 굉장히 크다.)
좋은 곡은 어떻게든 역주행 시켜버리고야 마는 요즘 추세를 생각하면 'Pantomime'이 타이틀이 아니었다는 게 무척 아쉽다. 슬쩍 들었을 땐 트렌디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결국엔 K팝 리스너들이 환장할 요소가 너무 많이 녹아 있는 곡이다. 며칠동안 이 노래만 계속 들었는데도 들을 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피어난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음악이 시각화 된다면 어떨지를 곱씹게 된다. 셰익스피어, 오페라, 핀 조명 등 연극의 요소를 적극 활용한 뮤직비디오, 로코코 시대 같은 의상, 망토를 휘날리는 동작이나 왈츠 혹은 탱고처럼 둘이서 하는 안무 등 대놓고 고전예술을 차용한 것들이 가득하다면 너무 멋있을 거 같다. 모든 걸 1차원적으로 풀어내도 노래가 1차원적이지 않아서 짜릿할 거란 확신이 있다. 오랜만에 K팝에 꽂힌 나를 과몰입하게 만든 무서운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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