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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과 서점 사이>

“여기 독서실 아니잖아요.” “여기가 독서실이지 아님 뭐야!” 나이 지긋한 노인이 20대는 될까 말까한 여성에게 소리를 지른다. 딱 나를 사이에 두고. 난 서점에 앉아 책을 읽는 중이었고, 내 양쪽 옆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바쁘게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내 왼쪽에 앉은 노인은 내 오른쪽에 앉은 청년에게 샤프소리를 내지 말라는 경고에 가까운 주의를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호통으로 바뀌었다. “이 정도 소리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잖아!” 이제 저 멀리 반대편의 사람들까지 이 쪽을 쳐다본다. 지독히도 소심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마를 감싸쥐고 크게 찡그리는 것 뿐이었다. “어디서 말대꾸야! 독서는 정신을 함양하는 것인데!” “고객님 그만해주세요.” “됐어요. 제가 ..

지인의 노트 2020.12.01

<지인의 고막>

어느 날 갑자기 귀에 통증을 느끼게 된 지인은 고막의 입장을 헤아려 보고자 모든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듣는 소리는 모두 22일 동안 지인의 고막이 지인과 생활하며 들었던 소리이다. 정오 즈음, 대학 수료와 동시에 백수가 된 지인이 느즈막히 눈을 뜬다. 지인은 정신을 차리자 마자 아이패드를 켜는데, 지인의 고막에게 백수인 지인과 아이패드와 넷플릭스의 조합이란 지옥과도 같았다. 가뜩이나 항상 음악을 틀어 놓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잠들기 직전까지 드라마를 보며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눈에는 눈꺼풀이라도 있지 고막에겐 아무 것도 없어서 지인은 듣지 못하는 지인의 코고는 소리, 이른 아침 엄마의 노랫소리 등을 들으며 매일 밤낮을 지새우는 데도 말이다. 겨우 몸을 일으킨 지인이 인간이 될 채비를 ..

지인의 노트 2020.12.01

<난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곳에서 살 거야>

"그 있잖아.. 요즘 몸이 안 좋으시다는 15단지 그 분?" 지인은 얼굴은 알지만 이름은 모르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주 겪는 일인데, 생각해보니 부모님의 지인들 중 이름을 아는 분들은 손에 꼽히는 것이었다. 만날 일이 없어 이름을 까먹었다기보단 볼드모트처럼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우리나라만큼 이름이 짧은 나라가 또 없을 텐데. 나는 왜 그 분들의 이름을 알지 못 할까. 이름 두 글자면 간단히 기억할 수 있는 분들을 '성당 회장님 할아버지', '12단지 LG 아주머니'와 같은 비효율적인 단어로 칭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지인이지만 내가 종종 뵙는 분의 경우엔 그 호칭이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기도 했다. '혜민이언니 아주머니'를 '혜민이언니 아주머니'로 부..

지인의 노트 2020.12.01

<우리는 쏜살같이 사라진 여름에 대해 생각해야 해>

"우리는 쏜살같이 사라진 여름에 대해 생각해야 해." "뭔 개소리야?" 연수가 쏜살같이 답했다. "이번 여름은 잘려나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흔적이라도 남겨야지." "그래서 뭘 어쩔 건데?" “잘 모르겠는데?” 당돌하게 말을 뱉어 놓고도 이번 여름을 붙잡기 위해 뭘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미뤄뒀던 경주여행을 당장 떠나야 할까 아니면 수박 자르는 도구라도 사야 하나. 올해만큼 미끄덩한 여름은 내 기억이 닿는 여름 중에선 단언코 없었다. 한국의 여름답지 않은 선선한 날씨, 끝없이 이어지는 장마,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져다 주는 미온적인 불안함까지 더해져 올 여름은 유독 서늘했다. 집에서 창밖을 보며 ‘비가 정말 하늘에 구멍 뚫린 듯이 쏟아지네’ 같은 상투적인 말을 열 번 쯤 하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코로..

지인의 노트 20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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